1. 서 론


1.1 연구의 목적

건축의 심미화와 더불어 건축이 이미지로 소비되는 행태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국내 사무소들의 운영 방식을 분석하고 분류하고자 한다.

이미지가 쉽고 빠르게 생산되는 오늘날의 건축은 착공 전까지는 3D 모델링을 거쳐 생산된 이미지들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서 존재하지 않는 화각과 빛을 통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공간을 포토샵 되어 왜곡과 변형을 거쳐 생산되고, 완공 후에는 건축 전문 사진가를 통해서 공간이 아닌 건축물의 조형들을 미적인 관점에서 포착하고, 그러한 관점을 견지하기 위하여 마찬가지로 포토샵을 통하여 왜곡되고 변형된 이미지로 생산된다.

위의 과정을 거친 이미지들은 건축 사무소들의 웹사이트나 SNS 계정에 게시되어 예비 건축주들과 건축학도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된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건축은 그 무엇도 아닌 아름다운 이미지 그 자체일 뿐 공간도 구축도 물질도 담론도 아니다.

건축가들은 단지 유혹할 뿐이다. 그 전략으로 앞서 언급한 이미지들만을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타 다른 방법들을 구사하고 있는 중이다.

그 전략은 다음과 같다. 고학력 혹은 유학의 경력 노출, 해외 유명 건축 사무소에서의 경력 노출, 언론에서의 노출에 대한 강조, 각종 수상 경력 기재, 도서 출판, 예술적 분위기를 풍기는 드로잉 게시 등이 있다.

건축가들은 경쟁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건축 행위에 있어서의 능력에 대한 경쟁이 아닌 유혹과 영업에서의 경쟁으로만 보인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설계자인가, 외판원인가 마케터인가?


1.2 건축과 이미지

사진이 발명은 건축가에게 있어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등장이었다. 거기 그 자리에만 존재함으로 인해 획득되는 건축의 장소성은 애석하게도 그곳에 직접 방문하지 않는 이상 그 공간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접근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진의 등장과 함께 공간의 경험이 지면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사진은 건물보다 훨씬 얇고 가벼워서 더 멀리, 더 빠르게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도서, 잡지 등의 매체는 그 파급력에 가속력을 더했다. 늘어나는 도서와 잡지, 신문 등의 출판물과, 같은 속도로 늘어나는 사진의 양 속에서 눈에 띄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아름다워지기 위한,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경쟁이.

건축의 좋고 나쁨이 심미적 기준에서 결정되기 시작했다. 건축가의 의도가 아름다운 사진이 찍히는 공간을 연출하는 것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보지도 않은 공간을 평가하고 판단하게 되었다. 몇 그램의 잉크와 종이를 경험한 이후에.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두드러진다. 인터넷, 더 많은 저장공간, 카메라가 달린 휴대전화. 이미지가 도처에 존재한다. 더욱더 빠른 속도로 이미지가 생산되고 소비되고 떠다닌다. 세상은 간접 경험을 제시하고 권유한다. 부유하는 이미지 위에 건물들이 있다. 올바른 각도에서 올바른 초점을 가진 포토샵 된 이미지들이 있다. 밝고 매끄럽게 정돈된 사진들이 있다. 그것은 내게 혐오감을 일으킨다. 너무 매끄러워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그리고 거기에 좋은 건축이 있다. 좋은 공간이 있다.


1.3 건축가의 말하기 방법

건축가의 말하기 방식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건축가들의 목젖을 울리는 것은 오직 이미지뿐인 것인가. 그들의 직능이 오직 아름다운 피사체를 만들어내는 것에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무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시대에 건축은 담론을 잃어가고 있다. 건축가는 토론하지 않는다. 비판도 비난도 하지 않는다. 의심도 실험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불평과 불만이 있다. 지독한 자기연민과 비관적 사고방식이 있다. 그곳엔 철학이나 비전 같은 것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불합리한 구조와 한없이 모자란 건축가에 대한 처우 때문에. 그들은 변명한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각 없이. 도무지 내용이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


1.4 도면이 아닌 다른 것들

내용을 잃은 건축은 그 자리에 고정된 채로 방치되고, 건축물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빠르게 증식하고 전달되며 영향력과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것은 가볍고, 피상적이며, 순간적이고, 휘발성을 가지고 있는 정보의 형태를 가진다.

도면이 아닌 다른 것들. 그것은 사진과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회화적 드로잉, 전시, 수상 내역, 학력, 경력, 영상, 도서 출판, 잡지에의 노출, 글, 강연 등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예비 건축주와 예비 직원을 유혹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유혹하는 것들에는 내용이 없다. 그것은 오로지 유혹할 뿐이다. 아름다움의 전략을 가지고, 허영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것의 결과로 그들은 갈취하고 착취한다.

이것이 사무실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운영 방식이다. 건축가들은 유혹하는 것에, 사람들은 현혹하는 것에 혈안이며 건축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도면이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해서 건축가들은 말을 할 수도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도면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커뮤니케이션에 꽤나 적합한 수단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는 있을지언정 그들에게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스케치를 몇십 년 동안 했다고, 글을 몇 년 동안 썼다고, 공부를 얼마나 오래 했다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1.5 외판원, 마케터, 혹은 예술가

그래서 묻는다. 건축가는 외판원인가, 마케터인가, 예술가인가. 사람들을 현혹해가며 영업을 하고, 더 많은 이윤을 찾아 헤매며 자신의 아우라를 구축해나가는 동안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어디이고 그들의 최종 목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그들의 건축적 자아에 비통한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의 내용 없음에. 그들의 모습을 실눈으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손과 발을 움직인다. 그들은 노예다. 외판원도, 마케터도, 예술가도 아니고.




2. 텍스트 읽기


2.1 건축의 마취제

“거기에는 이미지가 전부다. 모든 것이 심미적 영역으로 전환되고 그 겉모습으로 가치가 매겨진다.” 참으로 그렇다. 이곳에는 보여지는 것이 전부다. 사람들은 보기 좋은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미지들이 갖고 있는 오브제성 외의 것은 보지도 않은 채 한 번의 눈길로 대상을 훑어 버리게 만든다.” 이미지들은 빠르게 소비된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빛은 망막을 통과하고, 그것보다 더 짧은 찰나에 인식된 정보를 처리한다. 거기에는 내용도 깊이도 없이 오직 심미적 기준에 준거한 판단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심미화는 그것을 마취시키는 것이고 그 대상과 연계된 유쾌하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심미화는 심미적인 특징 이외의 것들을 모두 주변적인 것으로 가치를 절하시키거나 나아가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을 생략하거나 삭제한다. 그리하여 대상은 오로지 미적인 속성과 특징만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마취 상태에 놓이기까지는 한걸음이다.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파장을 지는 건축 이슈들은 너무나 자주 심미적 근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오로지 심미적인 근거들만이 남고 나머지는 주변적이게 되거나 생략 혹은 삭제되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있어서 오직 미적인 근거만을 가지고 판단하고 결정하게 되는 일들이 빈번하다.

“만일 사라예보의 파괴가 심미적 디자인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고, 걸프전의 이미지들은 농구 경기와 광고와 동일한 수준으로 다룰 수 있다면, 의미 있는 건축 담론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세계는 모든 내용이 비워진 채 심미화되고 마취되었다. 그리고 건축 잡지의 반질반질한 페이지와 유행에 민감한 영역인 건축학교 만큼이나 이 같은 상황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세계를 심미화하는 것은 일종의 마비를 초래한다. 마비는 고통이란 관념을 유혹적인 이미지 차원으로 축소시켜버린다. 이러한 심미화의 과정이 위험천만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 내용이 포섭되고, 흡수, 거부될 수도 있다는 데에 있다. 그 이미지의 유혹은 사회적 의식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와는 반대로 작용한다. 건축은 잠재적으로 이러한 심미화된 영역에서 타협한다. 건축가들은 덧없는 이미지, 표피 막을 물신화하는 심미적인 것에 특히 민감한 것 같다. 세계는 심미화되고 마취화된다. 이미지에 취한 세계에서, 건축 미학은 마취제가 될 우려가 있다.” 그렇다. 건축은 심미화된 영역에서 너무나도 쉽게 타협한다. 우리가 좋은 건축이라 말하고, 공부하고, 따라하려고 하는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대부분 심미적인 이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건축가들은 예쁜, 이쁜 공간을 설계하기 위해 애쓴다. 학생들은 예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렇다면 건축은 어디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건축은 아름다움에 속해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노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의 작품이 ‘혁명적’이라 주장하는 건축 이론가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주장들은 그저 심미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다.” 우리는 세계는 오직 심미적 차원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혁명도, 성공도, 성취도, 만족도 오로지 아름다움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건축계 내에서 통용되는 아름다움이 있는 듯하다. 모두가 비슷한 3D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비슷한 구도의 사진을 찍어 비슷하게 생긴 웹사이트에 그 모든 것들을 게시한다.

“유혹은 담론으로부터 의미를 떼어내고 담론이 추구하는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유혹은 순전히 시각적 차원에서 관람자를 매료시키고 더 깊은 차원에서의 탐구를 가로막으려 한다. 그런 까닭에 유혹은 ‘해석’과 대비될 수 있다. 해석은 표면적인 외양의 영역을 깨뜨리고 어느 정도 기저를 이루는 진리를 물으려 애쓰는 반면, 유혹은 황홀하게 만드는 표면 세계 속에서 관람자들의 넋을 빼놓으려 하면서 결코 그 너머를 보려하지 않는다. 겉모습의 영역 안에서 미적거림으로써, 유혹은 의미 탐색을 억누른다.” 심미적 차원에서의 설득은 유혹으로 귀결된다. 유혹에는 내용이 없다. 유혹의 주체는 대상을 마비시키고 마취시킨다. 아름다움에 압도된 대상의 판단력은 흐려지고 그에게는 어떠한 해석의 능력도 남아있지가 않다.

“이미지는 그 자체에 유혹의 잠재력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유혹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의미는 너무나도 쉽게 이미지 위에서 미끄러지고, 관람자는 이미지 앞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뿐, 해석의 능력을 쉽게 잃어버린다. 그러한 이미지의 속성 때문에 이미지는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매개체로 사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계의 심미화가 너무나 맹렬해서 유일하게 남은 전략은 유혹, 즉 겉모습들의 공허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지는 유희뿐이며, 그곳에서는 비평은 힘을 잃고 자기만족과 매혹이 장악한다.”

“피상적이고 유혹적인 이미지들과 반짝이는 효과로 이루어진 건축문화 내에서, 철학은 늘 일종의 지적 허영, 효면적인 겉치레로 도용될 위험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철학은 한낱 패션 액세서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2.2 말하기의 다른 방법

“사진은 이 남자, 이 말, 이 마구가 존재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들 존재의 의미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미지는 의미에 대해 침묵한다. 그것으로부터 어떠한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건축가들이 생산하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무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들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대신에 아름다움을 전시하고 과시할 뿐.

“기억된 이미지가 연속된 경험의 찌꺼기인 데 반해 사진은 어떤 단절된 순간을 그대로 인용할 뿐이다.” 이미지는 어쩔 수 없이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맥락 속에는 의미가 있고, 의미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모호하다. 그것은 특정한 맥락 속에 존재하지도 않고, 특정한 의미와 내용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어떠한 관찰자가 이미지를 해석하려고 할 때에 그는 필연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한 혼란을 피해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에 그치는데, 이 지점에서 이미지는 관람자를 현혹시키거나 유혹한다.

“우리 삶에서 의미는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미는 연결하는 것에서 발견되며 전개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줄거리 없이, 펼쳐짐 없이 의미란 있을 수 없다. 사실과 정보는 저절로 의미를 이루지 못한다. 사실은 컴퓨터에 집어넣어 계산을 위한 요소로 활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서 절대로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 의미는 맥락과 흐름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맥락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 이미지는 쉽게 유혹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영리한 건축가들은 유혹의 전략을 세우고 이미지를 앞세워 사람들을 현혹한다.

“사진은 모습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온다. 사진이 독자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번역하는 게 아니라 인용해 오기 때문이다. 흔히들 사진은 거짓말할 수 없다고 한다. 곧이곧대로 박아내기 때문에 거짓말을 못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진은 대대적인 속임수와 왜곡에 이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이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미지는 번역하지 않고 인용해 오기 때문에 그것은 관찰자로 하여금 해석을 요구하는데, 대부분의 해석이 본래의 의미(의미라는 것이 존재 한다면)에 빗겨나갈 뿐만 아니라,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게으른 해석자로서 이미지를 마주하기 때문에 이미지에 대한 해석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앞서 여러 번 말했듯, 이러한 지점에서 이미지의 유혹이 진행된다.




3. 건축사무소 웹사이트 분석


3.1 유혹하는 건축가들

여러 건축 사무소의 홈페이지들을 관찰한 결과 오로지 이미지만으로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있는 곳들이 많았고, 이는 건축의 심미화, 즉 미적 근거에 의해서만 프로젝트가 설명되며, 건축가들은 유혹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더욱 몰두하고, 사람들은 결국 이미지에 취해 겉모습의 세계에 머물며 더이상 어떠한 건축 담론도 형성되지 않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3.2 유혹의 종류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서 유혹하려 애쓴다. 그들의 유혹은 건축주가 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과 사무소의 직원이 될 수 있는 건축 전공자들로 향한다. 그들은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유혹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가지각색의 방법을 통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한다.

유혹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그들의 잘난 학력을 과시한다. 그들은 좋은 대학교와 해외 유명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또 그들은 경력을 자랑한다. 그들은 대가로 일컬어지는 유명 건축가들의 사무소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몇몇 중요한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들은 독립하여 자신의 사무소를 차리는데, 그들은 온갖 의미를 부여하여 사무소에 이름을 짓고, 유행처럼 종로와 강남에 사무실을 두고, 비슷한 웹사이트들을 만든다. 나는 이것이 너무나도 유치하고, 꼴사납다고 생각했다.

일을 시작한 이후로 그들은 홈페이지의 about란에 학력을 기재한다. (46개의 사무소 중 37개의 사무소가 그들의 학력을 기재했다.) 그리고 그들의 홈페이지는 주로 영어로 만들어져있다. (46개의 사무소 중 39개의 사무소가 영어와 한국어를 혼용했고, 7개의 사무소는 오직 영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이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이미지, 드로잉, 3D 이미지, 모형 사진, 다이어그램, 수상경력, 인스타그램 주소, 전시 참여 정보, 출판 내역, 영상, 가구, 강연 내역 등. (표 3 참고) 그리고 나는 이것이 건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건축 이미지와 건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그것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이 나열하고 전시하는 것은 이미지이지 건축이 아니다. 그들은 건축이 아닌 다른 것, 다시 말해 도면이 아닌 다른 모든 것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에 급급하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이 몹시 애처롭다.


 





REFERENCES

1. Neil Leach (1999). The anaestheticts of architecture, Cambridge, The MIT Press.
2. John Berger (1995). Another Way of Telling, Bloomsbury.